2009년 09월 15일
정지된 시간의 노래 / Die liebe Far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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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 me a grave in the turf,
Cover me with green grass:
My sweetheart is so fond of green.
No black cross, no colorful flowers,
Green, everything green all around!
My sweetheart is so fond of green...............


*
병을 얻은 청년이 병상에 누워 머리칼이 다 빠진 채로, 단 한개의 피아노 건반도 울려보지 못한 채 작곡한 노래는
아마도 그 청년의 마음 속에서 수만번도 더 넘게 울렸을 것이다.

그 청년이 과연 마음 속에 최종적으로 희망을 품었을까, 혹은 절망으로 끝내 죽음을 택했는가 묻는 일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없는그 곳에
때로 시간은 정지하거나, 혹은 정지하기를 열망하고,
그 정지한 시간이 과거를 바라보며, 정지한 시간이 미래를 짐작한다.

그의 젊음도, 그렇게 병과 함께, 느닷없이 정지해 버렸을 것이다.


**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은 절망감과, 그 곳에서 벗어나길 열망하는 희망의 대립으로 
그렇게 간단히 나뉘는 이분법이라면 얼마나 간단할까. 

그러나 슈베르트가 병상에서 작곡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ie schöne Müllerin)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방랑의 노래로 시작하여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을 빼앗기고, 시냇물의 자장가를 듣는, 
화자인 이 젊은 청년은 도대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서 있는 것일까?

'상실' 에서부터 명확히 출발하는 Winterreise와 달리
이 연가곡은 비극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행복에 달뜬 젊은이와 사랑에 설레는 마음, 별스럴 것 없는 질투의 감정이 결국 지독한 고통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상실과 절망,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Winterreise 보다. 어찌 보면 훨씬 더 비극적이다.

사실과 감정을 따라가다보면, 이 연가곡은 제법 뻔한 연애담에 흥미로운 '이야기' 가 펼쳐진다고 느껴지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그리고 마지막 곡을 듣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존재는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린다.
마치, 유령의 노래였던 것처럼....

그러나 애초부터 그의 모습이 '유령' 이었던 것은 아니다.
첫 곡부터 열 다섯번째까지는, 약간의 불명확함 속에서도 그저 그런 추억담을 회고하는 평범한 젊은이의 모습일 뿐이었다.
출렁이는 음표들로, 사랑과 설레임을, 혹은 질투와 증오를 울려대던 피아노 반주가
느닷없이 시간을 정지시키기 전까진 말이다.



***
열 여섯번 째 곡에서, 화자가 그려내던 과거의 시간들은
똑같은 음표를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갑자기 멍멍하게 정지해 버린다.
마치 정지된 시간을 그려내듯, 오른 손으로 똑같은 음(E)만 반복해서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는 그대로 가슴에 멍처럼 남고
존재는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렇게 갑자기 정지해버린다.
(원곡인 테너버젼에서는 F# 으로, 바리톤 음역은 E음으로 들리는데 악보가 없어서 정확한 지는 .... )

노래도 노래지만,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같은 그 단 '한개의' 음은
먹먹하기만 할 뿐 쏟아내지 못하는 정지된 눈물처럼,
벗어나지 못할 시간의 속박처럼, 답답한 채 그저 제자리 뛰기를 하는 심장 소리처럼 들려온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의 존재는, 그저 '연명' 하고 있는 심장박동이 된 것은 아닐까.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과거에, 그의 어여쁜 여인은, 초록색을 좋아했었고
그의 정지된 시간 속에 바라보는 미래 속에, 그는 그의 모든 것을, 심지어 그의 무덤까지도
그녀가 좋아했던 초록색만으로 남겨달라고 노래한다.
초록색 잔디 아래 묻어달라고, 십자가도 꽃들도 필요 없이 오직 초록색으로 물들여달라는
그것은 절망일까, 혹은 희망일까, 
청년은 도대체 어떤 시간 속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슈베르트는 대답대신, 똑같은 음표를 마냥 두들기고 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모든 것은, 여기서 정지해버렸다,고 말하는 듯. 

탄식이 깊어지고 숨을 몰아쉬어도, 피아노의 음은 정지된 시간을 움직여주지 않는다.


****
그렇다면 그렇게 멈춰진 그 곳이 시작인가? 물어보며 고작 남은 네 개의 노래를 따라가다보면
청년의 발자취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의 자취를, 지나간 과거의 흔적(화자의 추억) 이외의 그 어떤 정황으로도 찾을 수 없을 때
그의 노래는 현재가 없는, 유령의 노래가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상실한 그 지점에서 시간은 정지하고,
마지막 곡에서, 그 모든 것은 실은 '없었던 것' 이 되어버린다.

모든 고통과 아픔을 묻고, 편안히 잠들라는 그곳, 그 곳이 그의 집이라고 말하는 시냇물에
그는 몸을 누였을까?  화자의 모습이 물소리와 함께, 변화의 폭도 없이 그저 고만고만한 음들의 출렁임 속으로
그렇게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같은 마지막 곡을 듣다보면
애초에 화자는 처음부터 그 어떤 현실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없어진 자리를, 누가 알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아프고 힘든 그 이야기를, 그 청년 이외엔, 누가 알 수 있을까?
사실 모든 개인의 고통은 그렇게,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
아마도 그것은 슈베르트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는 그렇게 갑자기 정지된 시간 속에서 젊음을 잃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 할 수도 없는, 희망도 절망도 말 할 수 없는 그는
머리칼이 다 빠진 채 병상에 누워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존재가 되어, 그렇게 시에 곡을 붙였을 것이다.

시간이 가고 미래가 온들, 그것은 결국 무덤으로 가는 미래, 나의 현재가 과거가 되어버리는 그 곳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청년이 담담하게 시냇물의 자장가를 따라가는, 슬프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발걸음은
슈베르트가 그려볼 수 있던 유일한 미래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외에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인 자의 슬픈 긍정성은 
삶과 죽음을 별개로 보지 않고, 희망과 절망을 별개로 보지 않는 시선을 만들어내고,
어느 한 방향으로만 무작정 흘러가는 것이 아닌 뭉뚱그려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과거와 현재과 미래가 한데 섞인 그의 세상 안에서
시간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 되어버리고
소리는 이미지가 된다.

미래도 과거가 되는 그 곳,
존재가 사라짐이 되고, 사라짐이 존재인 그 곳,
소리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들이 소리를 불러오는 그 곳,
슬픔이 기쁨의 노래가 되고 기쁨이 슬픈 안타까움과 함께 가는 그 곳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영원한 젊음이 가능한 곳은 아닌가 모르겠다.




 
Schubert  -  16.Die liebe Farbe  ( Die schöne Müllerin D.795) / Goerne

by 그림자놀이 | 2009/09/15 03:21 | 낭만주의자의 취향 | 덧글(5)
Commented by Levin at 2009/09/15 05:15
읏....이거슨 단순한 블로그 글을 넘어선 문장이군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9/16 03:08
음.... 그거슨 좋은 의미?
Commented by Levin at 2009/09/27 16:50
물론 좋은 의미죠 :>
Commented by 나디르Khan★ at 2009/09/15 13:52
글이 온몸을 울리네요.......어젠 자면서 죽음과 소녀를 듣다가 울어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다시 그 기분이 되어버리는걸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9/16 03:09
자면서 왜 그런 음악을 들으셨나요?... 라고 묻지만 저도 자주 듣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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