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02일
슈베르트를 치는 일.
*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들은 듣는 즐거움 보다 연주하는 즐거움이 한 백만배는 더 큰 것 같다.

그러니까, 그냥 들었을 때랑 직접 연주할 때랑 어마어마한 차이가 느껴지더라는 것...

물론 베토벤 소나타도 그렇고, 바흐의 곡들도 그렇고, 쇼팽도 그렇고..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들은 그 차이가 너무도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실력이 딸려도 한참 딸리는 나같은 사람에게,
사실 바흐를 치는 일은 '모든 손가락에 힘을 고르게, 분리' 하는 일로 대충 마무리가 되고
(그것에만 촛점을 맞추고 죽어라 연습하면 얼추 들을만한 소리가 나온다.)
베토벤을 치는 일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확한 방향으로 힘을 몰았다 풀었다 하는 일' 로 대충 마무리가 되며
(그거에만 신경을 쓰면 또 얼추 들을만한 소리가 날 '때' 도 있다.)
창피한 일이지만 쇼팽을 치는 일은 '페달을 밟아주는 일' 로 대충 마무리가 되는데 (그래서 안치는 쪽으로 결론을 낸다.)
슈베르트를 치는 일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늘 만만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아주 특별하고 세심한 방법으로 건반을 쓰다듬거나 눌러주거나 내리치지 않으면
'얼추 비슷한 소리'조차 나와주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악상 기호는 무려 ppp 에서 fff 까지 한 페이지에 다 나올 때도 있고,
시도 때도 없이 크레센도 디크레센도가 반복되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판 엉뚱한 곳에 악센트 마크가 있는 경우도 허다하거니와
심심하면 조가 바뀌고, 몇 장 째 열심히 달려왔는데 허걱, 스럽게도 반복구가 나올 때도 있다.

p와 pp로 도배가 되어있는 페이지를 치는대도, ff로 도배가 된 베토벤의 소나타를 치는 것보다 팔과 어깨가 열배는 더 긴장이 된다.
그저 여리게, 가 힘을 빼는 일만 가지고 되는 일도 아니고,  뭔가 절묘한 힘조절 없이는는 도저히 불가능한데,
어쩌다가 조금씩 감이 올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뭐, 연습을 제대로 할 시간이 있어야 감이 오든지 말든지 하지.....)


**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잘 내지 못할지라도
여하튼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하는 일은 듣는 것보다 백만배는 더, 일종의 충격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을 때는 매양 거기가 거기 같은데, 막상 악보를 읽고, 치다보면 그 절묘함이 이루 말 할 수 없달까...
엉뚱한 것 같은 악센트는 묘하게 리듬을 타게 되고,
느닷없는 것 같은 조바꿈은 필연이다 싶을정도로 너무나 당연스러운 흐름이 되고
그렇게 변화할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완벽하게 분위기가 바뀌는데,
손가락 밑으로 흘러가는 슈베르트의 선율은, 그저 마법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현실의 아름다움을 쫒고 있는, 과거로 향한 시선, 이라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 같지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칠 때마다, 저런 어이없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첫째를 낳고서도 오른팔이 신통찮았는데 둘째 낳고서는 허리까지 신통찮게 되고 말았다.
뭐 딱히 무리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지난달부터 허리와 어깨 통증이 만만찮아서 피아노도 일부러 치지 않았는데
그게 벌써 한달을 훌쩍 넘고 말았으니, 요즘 별 이유 없이 괜히 기분이 우울한 것도 사실 딱히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엊그제는, 잠도 안 오고 힘들고 해서,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D.959 소나타를 한 번 쳐보기 시작했는데,
이거, 원래도 좋아하는 곡이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줄이야....!!  혼자서 야밤에 그만 졸도하기 직전까지 가버렸다.

그래도 당분간은 피아노를 안 치는게 좋을텐데... 싶어서 오늘은 애써 악보를 덮었더니 괜히 서러워졌다.
필라테스를 하는 날은 좀 괜찮아지지만 , 그것도 채 하루를 가기 힘들고,
강사 말이 '무조건 쉬는 일' 밖에는 수가 없다니 '불치병' 이라는 말과 다를 게 뭐겠는가....

아쉬워도, 우울해도, 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는 피아노를 덮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몸에 더덕더덕 파스를 붙이고 누워있다.

다행인지도 모른다. 저 곡 2악장 치다가는 제정신으로 나올 일이 희박하다.
애 둘 딸린 엄마가 빠져들 곡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고 합리화를 시키다가 흠칫했다.
내가 '나'인 시간들을 내 스스로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 아, 정말 대단한 '책임감' 이다......






Schubert Piano sonata D.959 1악장 중,.... played by me.

너무도 절묘하게 다시 '처음' 으로 돌아오는 그의 화법이란!
들을 때도 그랬지만 치다보면 기가 막힐 지경......
아, 나는 왜 이 소나타를 왜 그리 오랬동안'지겹다' 어렵다' 했을까. 쳐보니까 너무도 '명확' 한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유 없는 부분이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촘촘한 그물처럼.
by 그림자놀이 | 2009/04/02 14:37 | 낭만주의자의 취향 | 덧글(11)
Commented at 2009/04/02 15: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4/02 23:23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
Commented by Lucienne at 2009/04/02 23:05
정말 공감이예요!! 특히 바흐와 베토벤과 쇼팽을 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신 부분...
정말 쇼팽은 페달링을 남발하게 되거나 하게되었던 뼈아픈 기억이... ㅜㅜ
그래서 찌프라의 연주를 보며 아 정말 프로는 이런거구나 싶었었지요... 고등학교 때!

슈베르트는 진짜 못치겠더라구요, 저는...;;; 전 슈베르트도 그렇고 쇼팽 녹턴도 그렇게 치기 힘들었어요.
쇼팽 녹턴을 치고 있으면, 뇌가 녹아서 손가락으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0-;;
정말 기분이 나빴던지라 손에 익은 곡도 웬만해선 안 치게 되더라구요...ㅎㅎ ㅜㅜ 슬픔...!

저 2년 전에 실기곡이 슈베르트 즉흥곡 Op.142에 No.3였는데, 그게 바리에이션이잖아요...
바리에이션1부터 정말 얼마나 어렵던지..ㅎ!! 그게 사실 정말 어렵달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슈베르트의 곡이 조금 뭐랄까, 섬세한 부분을 살려줘야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물흐르는듯이 쳐야하고, 멜로디만 부각되게 쳐야하니까 왼손에서도 주선율은 강하게, 조선율은 그냥 들릴까말까 정도로...
뭐 이런걸 살리는게 굉장히 어렵더라구요...ㅎㅎ 아~ 지금 생각해도 악몽이예요 @_@!!!

^^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구가 주변에 많다보니 항상 그들을 보면서 느끼는건,
프로의식을 가지고 피아노를 치는건 정말 힘든 일일 것 같아요.
그냥 재미있게, 스트레스는 극소화해서(ㅎㅎ) 치면 완벽한 연주는 아니더라도 재미있고 나름 성취감도 드니까 좋아요..~!
Commented by Lucienne at 2009/04/02 23:11
(댓글 달았다가 틀린 점이 있어서 지우고 다시 수정;;)

윗 댓글이 너무 길어서 창피해요;;

오늘 과동기 중에 첼로를 오래 배운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더러 언제 우리집에 놀러와서 첼로 피아노 2중주 해보자고,
하이든 첼로 협주곡 C장조로 결정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 그림자놀이 님의 피아노 실력은 엄청나요.
아가들 키우시느라 정신없이 바쁘실텐데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나중에 엄마가 되어도 이렇게 잘 칠 수 있을까요?!ㅠ
열심히 연습해야겠지요! ♡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4/02 23:40
슈베르트 치는 게 정말 어렵더라구요.. 막연히 '좋아해서' 붙들고 있곤하는데, 치다보면 그의 곡은 뭔가 '다른 장르' 인 것 같단 말이지요. ^^;;
슈베르트 소나타들은 어디서 배워본 적도 없고...
그래도 정성껏 치다보면 애정이 각별해지는 곡이기도 하구요... 피아노를 누르는 뭔가 특별한 방법들을 익혀가는것 같기도 하고,
대화하는 방법을 깨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는 오히려 소나타보다 즉흥곡과 악흥의 순간이은 더 힘들더라구요. 즉흥곡 2곡과 악흥의 순간은 피아노 칠 때 다 배웠어서 별 문제가 없으려니 했는데 오히려 더 어렵더라는...

실내악이나 피아노 듀오 한 번 해 보는 게 평생 소망인데,(사실 아들놈들이랑 하고 싶은데 어느 천년에 키워서 해 볼런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으로 슈베르트의 곡들을 꼽고 있으니, 목표가 심각하게 큰 건 아닌가 싶습니다. ^^

주변에 다른 악기 하는 친구가 있으시다니 너무 부럽네요. ^^

애들 좀 키워놓고, 집에 피아노 한 대 사 놓고, 조금씩이라도 매일 매일 연습할 수 있게되면, 금방금방 나아지겠지, 뭐 그런 마음으로 산다는... ^^
지금은 뭐, 시궁창에서 잠시 햇볕보는 기분이랄까요, 피아노 치는 일 말입니다. ^^
Commented by 2번타자 at 2009/04/03 13:37
대단하시네요.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딱딱한 돌기둥이
피아노란 바다에 발을 담그었답니다.
이 굳어진 몸으로 출렁거리고 , 잔잔하고, 파도칠 수 있을지 후들거리는 군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4/03 14:18
일단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외로운 악기지만, 평생 친구하기엔 또 이만한 녀석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네요.
Commented by lieschen at 2009/04/05 04:13
앗, 연주가 글 느낌하고 비슷하세요. 성실하고.. 귀엽게 치신다고 하면 실례일까요? ^^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4/05 04:58
실례는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귀엽다' 는 말에 헤벌쭉 기분이 좋아집니다...(주책!),
- 앞에 달라붙은 '성실함' 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

사실 어깨랑 팔이 아파서요, 요즘은 안 친지 꽤 되었어요. 손가락에 힘 주기도 힘들구요... 요즘은 만사 서럽다는... --;
Commented by BuxWV at 2009/07/15 21:59
역시 그런거군요....전 초딩때 조금 배운게 다라서 잘 짐작할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만 들으면 미친듯이 피아노가 치고 싶어져요. 다른 피아노곡들을 들을때는 느낄 수 없던 욕구거든요. 정말 뱃속 저 밑부터 근질근질하게 뭐가 올라와요. 이 곡을 들으면서 지금 느끼는 청각적 쾌감이 내가 연주를 해봐야 완전하게 충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뭔가 2프로 모자라 갈증을 느끼게되는 그런 상태가 되는데 특히 루빈슈타인 연주의 960 들으면 그게 극대화 되는 것 같아요.
아이가 크면, 꼭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데, 이유와 목표는 슈베르트 소나타를 연주해보기거든요.
오늘 그림자놀이님 블로그에 불쑥 와 예전 글들을 이것저것 읽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나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7/16 03:29
꼭 도전해 보세요.
바흐 곡들을 치는 것들도 사실 쾌감이 만만찮지만,
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을 치다보면 정말 취합니다. 저처럼 손이 작은 사람은 좀 치기 어렵긴 하지만요... 혼자 즐기기엔 정말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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