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21일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일


*
근자에 발견한 사실 하나.

들통으로 들이마셔도 커피를 마시면 잠이 왔고, 녹차도 마찬가지였는데
홍차의 카페인이 내 몸에서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효과를 발휘해서, 카페인 따위에 잠을 내어주지 않았던 나로서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늙고 예민해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멋은 고사하고 아침부터 아이들과 제정신으로 씨름하려면 뭐든 각성제가 필요한데
설탕의 효과 이외엔 보지 못했던 커피와, 향이 주는 안정감 이외엔 효과를 보지 못한 녹차와 달리
분명 홍차 속의 카페인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찻잔을 들면 졸졸 따라다니며 한 모금 하고 싶어하는 어린 둘째를 따돌리기 위한 방법은 서랍장에 서서 마시는 방법 밖에 없다.
틀지도 못하는 오디오에, 펼치지도 못하는 악보 옆에 두고 마시는 홍차도 나름 운치 있다고 생각해야지 어쩌겠는가.
'잠을 깨워주는 차' 를 만난 것만 해도 다행이다. 향도 괜찮고....
 



**
근자에 발견한 사실 둘,

 위 악보에는 슈베르트의 자필 악보 사진들과 설명이 아주 상세하게 되어있는데
슈베르트의 악보는 정말 슈베르트같다.
필체를 보고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악보 그리는 것도 그 비슷한 게 있는데,
그의 악보에 나온 필체는 소심하고 꼼꼼해 보이면서도, 마치 여고생들의 '귀염체' 같은 면도 가지고 있다.

베토벤의 악보가 온 천지 난리속 같은 휘갈김과, 종이가 찢어질 것같은 날카로운 필체로 가득하고
바흐의 악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엘레강스로 가득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슈베르트는 정말 소박하고,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필체를 가졌다.

자필 악보를 볼 때, 그 안의 음표들은 모두 '곡선' 이고 그 웨이브가 종이 안에서 춤을 추고 있으며, 프린트된 악보를 볼 때 직선으로 깔끔히 떨어진 그 딱딱함 속에 모든 마법은 사라지고 만다, 고 했던 쉬프의 말은 일리가 있다.
프린트 버젼보다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자필악보를 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감정을 들려주는 것이 사실이다.
필체 자체가 이미 분위기를 말해주지 않는가.




레빈님의 사랑, D960 2악장의 자필악보.



음표 자체가 춤을 추는, 너무나 엘레강스하고 똑부러지는 바흐의 자필악보.- 평균율
(개인적으로 음표를 어떻게 이렇게 이쁘게 그릴 수 있는가 늘 경악. 글씨도 넘 이쁘게 쓰고...  위에 프렐류드, 쓴 글씨 체 보라..프린트 할 필요가 없다는... 아.....갖고싶다, 갖고싶다, 갖고싶다......--;) 


성질 급하지만, 확신에 가득찬 듯 쭉쭉 뻗는 베토벤의 자필악보. 프린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알아 볼 수가 없다. - 피아노 소나타 0p.111




***
근자에 발견한 사실 셋,

음악이나 문학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할 상대가 옆에 있었으면(온라인 상에서 말고) 좋겠다는 것.
별 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게 나이 드니까 참 외롭다는 것.
부부가 함께 같은 취미가 있는 걸 보면 참 부럽더라는 것.






 근자에 푹 빠져 듣고 있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중의 으뜸.

Schubert Piano Sonata in C major D.840 ('Relique') 2nd mov / Bre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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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자놀이 | 2009/01/21 05:23 | 낭만주의자의 취향 | 덧글(11)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9/01/21 08:27
바흐의 경우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 큰 형의 악보를 몇 년간 몰래 베끼던 혹독한 수련의 결과가 아닐까요. <(^ ^);;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1/21 14:10
단순히 수련의 결과물이라기엔 너무 예술적이라서 말이죠....^^
Commented by kristine at 2009/01/21 08:31
으음... 여기 커피 마시면 잠이 오신다고 하시는 분 두번째 분 뵙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커피나 홍차 몇시 이후에 먹으면 그날은 날밤 새는데... 그런데 특이하게 몸이 예민해지는 때가 있나봐요. 그럴때는 마셔도 오케이고... 어쩔때는 네스퀵만 마셨는데도 괴롭고요.... 홍차는 어떤거 드세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1/21 14:11
바쁘고 정신 없으니 그냥 얼 그레이, 티백으로 마십니다.
Commented by 나디르Khan★ at 2009/01/21 14:29
바흐가 귀엽다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새 인터넷에서 떠도는 춤추는 글자들과 비슷하기도 하고...옵아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ㅋㅋㅋㅋ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1/21 14:44
어쩌면 귀여운 분이셨을수도.....(16분음표들 묶음 그릴 때의 가로선을 보세요. 샤샥 통통하게 둥글려서 두개의 선을 긋는게 여간 귀여운게 아닙니다. ^^)
Commented by Levin at 2009/01/21 15:55
오늘 사진은 된장냄새가(!) 자욱한 것이 몹시 마음에 드는군요. 저도 티볼리라도 갖고 싶은데 요새 너무 딸리네요. 찻잔이 소박하면서도 날렵하니 이쁩니다.

베토벤의 자필악보는 필체만 보면 혹시 현대음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아방가르드라던가 하는거. 오죽하면 악보대필자를 모티브로 한 베토벤 영화가 나왔을까 싶군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으려니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 소설의 한 부분이 생각납니다. 지루하기에 질리지 않은 것이 슈베르트의 소나타라고 했죠.

거기선 D Major 소나타였군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1/22 11:58
아.. 저도 진짜로 '된장'' ... 그런 거 한 번 해 보기나 해 봤음 좋겠네요...

그나저나 하루키의 말은 참 묘하군요. 지루하기에 질리지 않다....
Commented at 2009/01/21 19:1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01/22 11:58
그것도 예전에 물어 봤었습니다. --; 간단히 답하자면 '좋아요' 입니다.^^
Commented by kristine at 2009/01/22 13:50
정말로 초기 치매증상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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