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7일
어긋나는 발걸음

*
얼마만인가.
귀에 이어폰을 꼽고 버스를 기다리고, 복잡한 도심을 걷는다.
종종 소리들은 시끄러운 소음에 더 많이 묻히고,  볼륨을 높여보아도 가느다란 피아노 소리는 쉽게 귓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붐비는 인파를 걸어가려면 그들의 속도에, 그들의 스텝에 나도 동화되어가야 하는데
빠르고 잰 걸음걸이로 걷는 일이 느닷없이 낯설기만 해서 종종 밀침을 당하고 떠밀리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발을 틀게 되고
성난 눈빛들에 주눅이 들어 가끔씩 벤치에 주저 앉고 만다.

그나마 베토벤이나 슈만의 곡들은 그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제법 전달되었지만
슈베르트의 곡은 '전혀!' 였다.
단순히 소리의 크기가 크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의 문제이고 화법의 문제같다.
슈베르트의 곡들은 아무리 볼륨을 높여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한 생존력도 전투력도 없는 그 소리들은 신기루같고, 안개같기만 해서 도무지 이 복잡한 도시를 거닐면서는
단 한개의 멜로디도... 귀로, 마음으로 잡아낼 수 없었다는 말.

그러구보니 결혼하고도 한참을 뚜벅이로 살아온 내가, 슈베르트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도 같다.
복잡한 일상, 지하철과 버스로 출퇴근 하면서 간간히 음악을 들었던 시절이다.
슈베르트의 말을 들어 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숨 한 번 몰아쉬고, 잠시 눈을 감을 여유도 안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 그저 길을 걷는 것도, 남과 속도와 흐름을 맞춰야 하는 것이 도시 한복판의 일상이다.
내 호흡에 맞추어 걸음을 걸을 수도 없는 것이 도시의 일상이다.


**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남편은 절대로 이해 못 할 일이겠지만
듣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아, 남편을 종용해서 미국 우리 집에 있는 cd들 몇 개를 리핑해서 파일들을 보내달라 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귓가에 울리는 슈베르트를 듣는다. 정적 속에서 비로소 그의 음악이 들린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말 없이 나란히 앉아서 함께 숨을 쉰다.
그도, 나도,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같다.



 Schubert - Moments musicaux No.4 / Brendel

by 그림자놀이 | 2008/11/17 17:14 | 낭만주의자의 취향 | 덧글(6)
Commented by 나디르Khan★ at 2008/11/17 18:12
아 아름다워라. 슈베르트의 곡은 첫사랑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들을때마다 마음 아파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8/11/18 11:43
아련하니 참 아름답지요....전 몇 년 째 슈베르트에 중독이에요. ^^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8/11/18 08:13
날이 갑자기 추워졌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전 하루밤 춥게 잤다고 바로 감기군을 업고 다니고 있네요. 포스팅도 떠오르고 해서 어제 일찍 자려고 악흥의 순간 음반을 틀었는데 제가 가진 것은 에밀 길레스... 역시 브렌델이로군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8/11/18 11:46
저랑 애들이랑은 미국에서 감기를 업고 여기 와서 다 퍼트리고 (--;) 고생 하다가 이제 좀 괜찮아졌습니다.
날이 오늘 많이 추워졌기에 긴장 바짝 하고 있지요. ^^
브렌델의 슈베르트 연주는 딱 제 취향인 것 같아요. 예술의 전당 자료실에서 슈베르트 연주를 처음 만난게 브렌델이기도 하거니와....
근자에는 쉬프의 연주도 좋게 듣고 있습니다만.. 첫사랑이 어디 가나요. ^^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8/11/20 00:38
그러고 보니 오늘 (아니 어제가 되었군요) 이 슈베르트의 기일이였군요. 의정부에서 보스트리지 독창회가 있었는데 참석할 수 있었더라면 뜻깊은 시간이 되었었겠죠. 역시 브렌델이 좋네요. ^^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8/11/20 11:12
슈베르트도 그렇거니와 보스트리지도 좋아하기에 한국오면 가야겠다, 싶었는데 예매하려다보니 장소가 고양 아람누리, 더라구요.... 게다가 1회공연으로 끝.
한국에서 보스트리지 인기가 사그러들었나? 하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습니다.

슈베르트 기일이었군요. 괜히 날이 더 추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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