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5일
슈베르트를 치고 있는 이유....
*
피아노를 사게 되면 무엇보다도, 다 끝내지 못했던 베토벤 소나타들을 쳐보고싶다고 생각했었는데
피아노가 오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난 곡들은, 의외로, 슈베르트였다.


베토벤과 마주하기에는 어쩐지 부담스러웠던걸까...
그래도 베토벤은 좀 건드려봤으니 손가락들이 어느정도 기억을 해줄텐데,
오래 쉬었다 연주하는 것이니 한번 쳐봤던 곡을 치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그래도, 느닷없다 싶을정도로 슈베르트 소나타들을 쳐보고 싶었다.
슈베르트는, 즉흥곡 빼고는 악보도 별로 봐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
우선, 좋아하는 D.664부터 시작하자고 몇주 째 붙잡고 있는데,
수월해보이는 악보와 달리, 무지 어려워서 애를 먹고 있다.
끊이지 않고 노래가 흘러나오듯 치는 것이, 물론 나에게는 불가능할 거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이야....


그러나, 연주의 질과는 상관없이,
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연습하면서, 마음을 홀랑 빼았기고 있는 중이다.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동안, 마치 절대 끝나지 않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해야 하나....
베토벤을 연주하면서, 어떤 고지를 향해 한걸음씩, 한걸음씩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는 기분이라면,
슈베르트를 연주하면서는, 마치 허허벌판을 끝도 없이 걷고있는 기분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 지는 더더욱 모르겠는 것처럼...


머리 속이 멍해지면서, 도돌이표를 계속 따라가며 몇번씩 반복하고 있다보면, 내가 몇 번 반복했는지도 모를만큼,
아니, 이게 연습을 위한 반복이 아니라, 원래부터가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하라는 곡인 것처럼......................




***
어쨌거나 요즘은, D.664의 2악장까지 대략 연습을 하면서
가끔씩 기분이 내키면, D.960... 마지막 소나타, 를 건드려보는 중이다...
역시나,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은 쉬웠는데, 연주하기는 생각보다도 훨씬, 100배쯤은, 어렵다...
1악장은, 너무나 길어서,
악보를 따라가며 연주를 하다가, 끝도 없는 미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그래도, 오늘은, 감정 이입이 된 탓인가......2악장은 처음으로 쳐 보는데, 별로 틀린 곳 없이, 쳤다.
리흐테르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들을만도... 했다. ^^;;;




이 곡의 2악장이, 이렇게, 심하게 절뚝거리는 모습의 악보였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눈으로 보고 있기에도, 왠지 머뭇머뭇, 불완전하게, 발을 질질 끌고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
속상한 일이 있어서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2악장을, 몇 시간동안, 계속 반복해셔 쳤다.
치다보면 슬퍼질 줄 알았는데, 치다보니 슬퍼지면서도, 왠지, 무심해졌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은, 혹시 똑같은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아무 것도 심각한 것은 없다고 중얼거려본다.

요즘은, 사는게 재미가 없다.  지쳤다.

 
Schubert piano sonata D.960 -2
by 그림자놀이 | 2006/11/25 16:37 | 낭만주의자의 취향 | 덧글(10)
Commented by Levin at 2006/11/25 20:20
저는 요즘 영화, 소설, 만화, 음악, 운동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우울하고 허무하기만 하군요.
이 세상에 지친 사람이 저 뿐만이 아니란걸 확인하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P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11/27 04:56
levin / 그래도 뭔가 파묻혀 지낼 것(시간?)이 있다니 부럽습니다.... 저야 애 재워놓고, 졸린 눈 비비며 자정이 가까운무렵까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괴기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라....
Commented by 엘리 at 2006/11/27 09:54
악보를 볼 수 있고..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무리데스. ;;;
Commented by Hagen at 2006/11/28 18:05
슈베르트 피아노곡은 아직 미지의 세계네요. 음악을 연주하며 즐길 수 있다는게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skalsy85 at 2006/11/29 00:55
그림자놀이님 너무 부럽네요... 피아노.가 있다면 저두 정말 쳐보고 싶은 곡.(이지만. 손 놓은지 몇년째. 초견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겠습니다..흑.)이네요~ 근데 저는 요새 맘.같아선 정말 죽도록 하농.만 쳐댈것 같은 기분입니다.. 일을 죄다 갈아 엎고. 처음부터 한계단씩 밟아 올라가고 싶기두 하구요. 또.. 악보 없이 미친듯이 똑같은것만 쳐대고 싶기두 하구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11/29 06:19
hagen / 연주하며 즐기는 수준은 되지 못하고, 주로 연주 하다가 포악해지곤 하지요. (손가락을 저주하며..), 슈베르트의 피아노곡들이, 알고 지낸지는 꽤 되었는데, 요 몇년 새 유달리 좋아졌습니다. 고독해서 그런건지...^^;;

skalsy85 / 저도 빠른 악장은 초견연주 불가입니다. ^^ 저도 며칠 전에 하도 열이 받아서 하농만 몇십분 쳤거든요?... 그 기분 이해합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11/29 06:19
앨리 /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 번 시작해보심이??
Commented by Hagen at 2006/11/29 09:49
슈베르트 피아노작품을 처음 접하려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은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11/30 01:06
hagen / 넘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곡 중에서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무작위로 알려드리면
D.664 , 850 , 894 ,959, 960 ,946 .... . 베토벤 소나타 추천해달라고 하면 결국 죽어라 생각하다가, 32곡 다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슈베르트의 피아노곡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좀 지겹다고도 하시는데, 저는 끊임없이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아서 너무나 좋아합니다. 특히 마음이 좀 쓸쓸할 때.
Commented by Hagen at 2006/11/30 01:0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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