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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자의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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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22일
Maurizio Pollini - Chicago 공연 후기 (4) - 앵콜, 그리고 사인회
*
그가 다시 무대 위로 나왔다.
다시 쇼팽이 울려퍼졌다. 녹턴 op27-2 . 아.. 그의 녹턴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다시 기립박수,
play 누르세요
이봐요. 어떻게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하면서도 그토록 영롱하고 아름답게 녹턴을 연주할 수 있는 겁니까...
멋적은 듯, 다시 나온 그는 프렐류드 한 곡을 다시 연주,
그리고 또 다시 기립박수.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어보이니 그는 이제 세 번째의 앵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 곡이에요, 라는 듯 연주한 그 곡은 에튀드 '혁명'
첫 도입부가 나오자 여기 저기서,
마치 이 곡을 정말 기다렸다는 듯 탄성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은 아예 좌석을 떠나 너도 나도 앞으로 나가 서서 그의 연주를 듣는 판국이었고, 나 역시 사실 한 다섯 줄 정도 앞으로 이동해서 그의 연주를 들었다.
분명 그는 '이제 이게 마지막이에요' 라는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연주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잘 못 짚은 것이 분명하였다. 귀신같은 에튀드 이후에 사람들은 더 열광하였고 그는 또 다시 나와야 했으니 말이다.
(
play 누르세요)
( 음반에서도 소름돋게 잘 치시긴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정말 까무러치게 잘 치셨다.
음 하나, 하나가 어쩜 뭉개짐 하나 없이 그리 다 들린단 말인가....)
네 번째 앵콜곡은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인 듯..(기억이 가물가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곡이 맞는지 아닌지...--;)
끝내시려면 조용한 곡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초절기교 연습곡이라...
본인은 마지막 서비스라고 생각하신 듯 했지만 관중들은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으니
폴리니는 역시나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치 "또 해야 해?" 라는 듯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약간 지쳐보이기 시작했다.
이 즈음, 몇 번씩 망설이다가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하도 조심스러운지라 반사적으로 찍은 것이 죄다 흔들리거나 인사하는 뒷모습 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적어도 1층에서는 나 하나 뿐이었기도 하였거니와,
"폴리니 팬이군요, 그를 위해서 플래시는 켜지 말고 찍으세요, 피곤해보여요
."
라는 아주머니의 속삭임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공연 시작하기 전에도, 핸드폰 전원 끄라는 안내방송은 나왔지만 핸드폰 전원 끄는 소리는 단 하나도 듣지 못했다.
게다가 중간 휴식때도 핸드폰 켜고 통화하는 사람도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관객들의 매너는 정말 폴리니의 연주 이상이었고 그 분위기가 어쩌면 서로 서로에게 무언의 압박이 되어서 행동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 며칠 뒤, 한국에서의 알반베르크 콸텟 연주에서의 그 몰상식 무매너들을 생각하면 열이 받는다..)
그리고 다섯번째의 앵콜곡.
왠지 느낌이 드뷔시의 곡인듯 하다고 짐작만 할 뿐.. 전혀 모르는 곡이라 자신은 없다.,
정말 마지막인 듯 숨을 고르고 천천히 연주하는 곡은 꿈결같이 아득한 울림처럼 들렸다.
그의 마지막 곡을 들으며 차츰 마음이 진정되고, 이제 그와의 짧은 만남도 끝나는구나 싶으니 왠지 서글퍼지면서 시간을 더 붙잡고만 싶어졌던 건
나 뿐이었을까?
무대 뒤로 사라진 폴리니.
1부와 2부, 그리고 다섯 곡의 앵콜을 다 듣고 그렇게 그와 피아노소리와도 작별을 고해야했다.
**
사람들은 연신 대단한 연주라며 하나, 둘, 준비된 사인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줄은 한정없이 길기만 했지만, 1층에 있었던 잇점 때문에 서두르지 않아도 제법 중간쯤에 설 수 있었는데
앞에 서계신 할머니께서 주섬주섬 커다란 가방을 열더니 앨범크기만한 뭔가를 꺼내시더니 일행에게 그때부터 한장, 한장 넘기며 자랑을 하시기 시작했다.
얼결에 나도 흘깃흘깃 보게 된 그것은, 할머니가 평생토록 연주회를 다니며 받아온 사인집이라는데
보기만해도 침이 꿀꺽 삼켜질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이미 빛이 한참 바래서 누렇게 너덜거리는, 카라얀과 줄리니의 사인부터 시작해서
드디어 굉장한 보물이라는 듯, 20여년 전의 폴리니 사인을 꺼내셨다.
귀퉁이가 제법 많이 닳은 폴리니의 20여년전 사인에는, 사인 이외에도 주절주절 말이 많이 쓰여있었는데 뭔 말인지는 모르겠고...
암튼 할머니는 이 사인 옆에다 오늘 그의 사인을 받을거라며 소녀처럼 들떠계셨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조용하던지, (아마도 중,장년층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다들 cd 하나씩을 손에 꼭 쥐고서
오늘 공연에 대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폴리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몸이 많이 힘드셨던 모양인지, 생각보다 폴리니는 금새 나오시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참..
진행요원 여럿이 와서 "지금 매우 피로하신 듯 하니 사인은 1인당 제발, 한개씩만 받고 빨리 진행했으면 좋겠다." 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사람들은 놀랍게도 두어개씩 가지고 있던 cd 들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고, cd케이스에서 표지를 빼서 사인받을 부분을 펼쳐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있던 부부와 아이는(말이 아이지 청년에 가까운) "우리는 가족이니까 한개만 받고 가자" 면서 부인이 그의 최근 녹턴만 빼고 다 가방에 집어넣었다.
모두다 거의 한결같이 조용히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요란스럽게 소리지르는 것만이 팬으로서 할 일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어릴적부터 닳도록 들어온 그의
'황제' 테잎
을 들고 온 나로서는, 그걸 차마 가방에 집어넣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모른다.
악수도 하고 말 한마디도 나눠보고 싶었지만, 폴리니가 힘들어한다는 말에 다들 어찌나 빠르게 사인회를 진행하던지,
thank you 한 마디 던지고 부쩍부쩍 줄어드는 앞 줄, 그리고 생각보다도 너무나 지쳐보이는 폴리니를 바라보며 차마 시간을 지체할 분위기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내 앞의 할머니.
간단한 이태리 인사말을 남기더니 책상 위에 떡 하니 그에게서 20년전에 받았다는 사인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시는게 아닌가.
얼굴빛이 흙빛이 되어 잔뜩 피로해보이던 폴리니가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이게 몇년도 연주인지 기억난다. 그 때 무슨 곡을 쳤다, 등등
뜨문 뜨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폴리니의 목소리는 굉장히 저음이었고, 그의 피아노 음색과는 상반될 정도로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힘들게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하던 폴리니는, 그 오래된 낡은 종이 위에, 오늘의 사인을 해 주었고 할머니는 또 만나자며 자리를 떴다.
스피디한 분위기를 일순 반전시킨 할머니 덕분인가.. 나도 머쓱하지만 용기를 내서, 그의 녹턴 앨범에 사인을 받자마자 재빨리 테잎표지를 꺼냈다.
"20여년전에 샀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의 연주입니다. ..."
폴리니는 기꺼이 사인을 해 주었고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사인을 하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매우 피곤했던 것은 사실인 듯 했다.
그를, 좀더 젊었을 때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두 장의 사인을 손에 꼭 쥐고 심포니홀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초저녁.
꿈만 같았던 그의 연주를 머릿 속에 되새기며 호텔방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어왔다.
내년 이맘쯤에 다시 시카고에 온다는데.. 그 때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내년에, 또 올 수 있을까... 나에게 이런 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머릿 속으로는 이미 '슈만이나 베토벤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이미 선곡까지 마치고 ....
그렇게 혼자 흥얼거리며 돌아오는 시카고 중심가의 거리는,
마치 나 혼자만의 것인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Pollini
#
by
그림자놀이
|
2006/06/22 05:52
|
어쩌다 한번씩 가는 연주회
|
덧글(
11
)
Commented by
Kristine
at 2006/06/22 07:52
녹턴이 이렇게 좋을수가...
Commented by
skalsy85
at 2006/06/22 09:04
그림자놀이님의 공연감상 후기가 참 리얼하군요~ +_+;; 연주곡마저 실황이었다면. 정말 실감. 그자체였을 것 같아요. 20년 전에 나온 그 tape 을 cd나 연주회의 흔적을 가져가서 사인을 받는것이 그가 더 고마움을 느꼈을꺼예요... 저두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보고 싶군요...콸텟 연주는 별로.이셨던가요? 아니. 연주자체가 아니라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나셨던건가요?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06/22 13:29
kristine / 저도 녹턴 별로 안좋아했었는데 폴리니옹 연주에는 완전히 반했습니다. ^^
skalsy85 / 알반베르크 콸텟 연주는 무지무지 좋았는데요, 관객들의 매너가 영.... 꽝이었답니다.--; 중간에 한 번,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연주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로...
Commented by
lite
at 2006/06/23 09:44
드라마같은 전개네요 +ㅂ+
싸인 참 단순명료 합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06/23 11:55
lite / 사인이 말이지요....사실.. 너무 안 멋있어서 좀 실망했습니다. 저게, 제가 썼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
스펠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멋진 사인이 나올 법도 한 이름인데.. .. 흠....
Commented at 2006/06/25 08: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06/25 15:31
비공개님 / 살다보면 괜히 눈물 글썽할 때가 있지요... 게다가 저 녹턴이 참 묘하게 약간 싸늘하게 사람 심금 울리잖습니까 ^^ / 사실 직접 연주를 보고 듣고, 사인까지 받은걸로도 만족입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 아직 그의 연주가 녹슬지 않았는데다가 어떤 부분은 더 좋아지기까지 했다는 점도 감격, 내년 5월에 시카고에서 또 만날 수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Commented at 2006/06/27 08: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6/06/27 12:45
비밀글 j님 / 반갑습니다. ^^ 말씀하신대로 실황과 음반은 참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음반으로 듣는 폴리니 연주는 사뭇 그날의 느낌과는 좀 다르게 들립니다. 폴리니옹도 나이가 드셨으니 아마 예전같은 연주는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저 역시 기억 속의 폴리니는, 귀신같던 에튀드의, 그 모습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연 내내 좀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더군요..) / 지난 봄에 보려던 플라이셔의 연주는 집안이 어수선하여 가지 못하고, 예정에도 없이 폴리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 연주에서 풍기는 느낌과 다르게 수더분하고 조용한 분이시더군요.
Commented by
JIYO
at 2009/10/30 03:43
제가 폴리니를 처음 기억하고 좋아하게 된 앨범이 '황제'입니다. 길 가면서 듣다가 몇 번이나 우뚝 섰더랬죠. 아아, 실은 언제 다시 댓글 닫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에 자꾸 종알종알 떠드네요. 일찍 일어나야 해서 자야 하는데;;; ㅠ.ㅠ
Commented by
그림자놀이
at 2009/10/30 03:46
댓글 안 닫아 놓을테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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