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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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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의 chicago는 싸늘했다. carbondale에서 챙겨간 반팔 옷들이 무색할만큼 싸늘한 공기와 바람. 한국 방문길에 chicago 몇박며칠을 굳이 끼워넣은 것은 순전히 폴리니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를 실제로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었고, 그 설레임은 적어도 한달 넘게 나를 꿈 속에서 헤매게 했을 지경이니, 이미 연주회를 보기도 전에 나는 행복감을 맛 본 셈이다. 5월 17일 일요일 오후 3시. 유난히 날씨가 좋아 거리는 도시다운 활기에 약간 들떠있는 듯 했지만 바람은 여전히 싸늘했다. (거리에는 심지어 패딩코트까지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 호텔에서 걸어?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한복판에 있는 심포니홀까지 가는 동안에는 미미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그의 사인을 받을 cd와 tape, 그리고 오늘의 티켓. 남편에게 아이를 홀랑 맡기고 짧은 작별을 하고 홀 안에 들어가니, 1층 중앙 15열의 내 자리는 생각보다도 더 폴리니와 가까웠다. 아, 얼마만에 혼자서 공연장에 와보는건가. 그것도 폴리니라니.. ![]() 드디어 불이 꺼지고, 영상에서 보았던 것 같은 수수한 할아버지같은 폴리니가 어정어정 걸어나와 쑥쓰러운듯 머쓱한듯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 날 관객들은 대부분이 40대 이상의 장년층이 많았는데, 그의 오랜 팬들이리라 여겨졌다. 흰 종이에 붉은 장미를 정성스레 싸들고 내내 공연을 관람하던 같은 줄의 노부인부터, 정장을 하고 코트를 입고 온 아저씨들까지... 그래선가, 그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박수는 열렬했지만 그가 피아노에 앉자마자 거짓말처럼 숨소리 하나 없이 무서울만큼 일시에 공연장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아노 앞에 앉고 적어도 한 호흡은 들이쉬고 연주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에, 오히려 관객이 내가 숨 고를 틈이 없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첫 곡은 쇼팽 녹턴 op.55 두 곡. 모 동호회 사이트에서 말도 많았던 그의 녹턴.. 자리에 앉자마자 울려퍼지는, 게다가 약간 빠른듯한 55-1 연주에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퍼지는 그의 녹턴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이 평이한 녹턴(이라서 나도 실수 없이 친다고 치는..)은, 사실 내가 가장 맘에들어하지 않는 곡 중의 하나다. 그런데 폴니니의 연주는, 듣는 순간 귀와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 뚝 뚝 끊어지는 듯한 도입부, 어쩐지 녹턴스럽지 않은듯한 선입관을 갖게 하는 이 곡을 감정을 듬뿍 담아서 늘여버리는 연주는 정말 딱 질색이었고, 그렇다고 바흐를 연주하듯 딱딱하게 치는 것도(사실 그런 연주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치는 게 사뭇 그런 느낌을 주는지라) 절뚝발이같기만 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듣다가 언제나 지루함에 트랙을 넘겨버리기 일쑤인 곡이었다. 그런데 폴리니의 55-1은 알싸하면서도 부드럽고, 넘치지 않으면서도 풍성하게 들렸다. 싸늘한 슬픔을 머금은 듯 우아하게 출렁거리는 음표들. 그 감정은, 한 호흡 가다듬은 후 고스란히 부드러운 환희의 노래처럼 55-2로 이어졌다. 누군가 이런 스타일로 사랑을 고백해 온다면, 단번에 넘어가리라 여겨질만큼 헤프지 않고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도 차갑진 않지만 은근히 도도한 매력을 풍기는 그의 녹턴은 혹평을 하고 접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싶었다. 활활 타오르고 격정적인 것만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눈물을 펑펑 흘려야지만 슬픔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폴리니는 충분히 다른 스타일의 화법으로 녹턴을 들려주고 있었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신선한 끌림과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 시각적인 이야기를 좀 덧붙이자면, 그는 연주하면서 굉장히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음 하나 하나를 어루만지듯 진지하고 또 상당히 사색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그 점은 사실 영상으로 그의 연주를 보았을 때도 참 이해되지 않는 면이었다. 그토록 신중해보이는 표정으로 건반을 누르는 그의 연주가, 왜 눈을 감고 듣고만 있으면 한없이 쉽게 치는 것처럼 들리는지 말이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보다 실연으로 그의 연주를 보면서는 사실 좀 의아심이 들었는데, 막힘없이 쉽게 들리는 그의 연주와, 신중함을 기하는듯한 그의 표정과 몸짓들이 주는 부조화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연주 자체가 도무지 막히는 구석 한 곳 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어쨌든 굉장히 쉽게쉽게 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겠지만, 가끔 '너무 쉽게'들리는 그의 연주들은 그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 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생각 뒤에도 여전히 폴리니의 연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뇌리에 박히곤 했지만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입 안에 머금은 박하사탕의 잔향이 오래가듯, 그런 느낌. 두 번째 곡인 op.48의 녹턴 두 곡으로 넘어가면서는 더더욱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연주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내가 이전에 듣던 쇼팽 녹턴과는 확연히 다른 연주...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감정을 절제한 연주라는 말은 적절치 않았다. 사실 감정을 담뿍 넣지 않아도 쇼팽의 음악은 충분히 가슴을 울리지 않는가. 폴리니의 연주는 아마도 그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허밍은 점점 더 자주, 크게, 들렸고 그는 충분히 음악 속으로, 연주 속으로 빠져들어가 있었다. 그는 전혀 감정을 '절제'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았고, 그의 연주도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고 있을 뿐. 그의 감정으로 쇼팽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쇼팽의 음악이 그를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폴리니가 들려주는 쇼팽의 녹턴은 폴리니의 녹턴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게 가슴을 울리는 쇼팽의 녹턴 그 자체였다. 그것을 감히 건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싸하게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호흡이 빨라지는 듯한 느낌, 가슴이 서서히 조여들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허밍에 한 호흡, 한 호흡, 숨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싸늘한 시카고의 날씨 위로 환하게 쏟아지던 햇살처럼 환영처럼 그의 쇼팽 녹턴에서 차갑지만 눈부신 빛을 함께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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